[ 제이 / 빈센트x리즈벳 (판도라 하츠) / @v993994 ]
나이트레이 가의 13일은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한 소음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주방은 식기와 주방 도구들은 누군가에 의해 맞부딪쳐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고, 그 밖에선 요리사들이 한데 모여 침을 삼키며 바싹 마른 목을 축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앞으로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에코가 있었고, 에코의 옆에는 얼굴 한가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길버트가 있었다. 정작 소음의 원인은 고개만 살짝 돌리면 보일 바깥의 상황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분주히 움직이고만 있을 뿐 다른 움직임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순간 주방 안으로 걸음을 들인 길버트가 ‘빈스.’ 하고 제 앞의 인물을 불러 세웠다.
“아아, 형 왔어?”
“지금 뭐 거야? 설마,”
“보이는 것처럼 사탕을 만들고 있어…….”
선물할 예정이거든. 리즈벳 님께.
빈센트의 마지막 말에 주춤하고 뒷걸음질 친 길버트가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과일 사탕을 만들 생각이었는지 적당한 크기로 썰려 있는 갖가지 과일들과 설탕물로 추정되는 냄비 속 액체.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와 있는 초콜릿들까지.
최근 제 동생이 리즈벳 님과 연애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샤론과 브레이크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빈센트가 최근 정인으로 발전한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사실은 꽤나 새로운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요리사들이 이른 아침부터 바깥에 모여 불안에 떨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양자이기는 하나 엄연히 나이트레이 가의 자식 되는 사람이 요리를 하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본인들에게 돌아올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겠지.
속 시원히 풀린 궁금증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주방 밖으로 나오는 길버트에 붙은 것은 이때다 싶은 요리사들의 시선이었다.
“……제가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 보세요.”
“정말로 괜찮은 거죠, 길버트 님?”
“괜찮아요. 걱정하고 계신 일들은 없도록 할게요.”
그제야 안심하며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들을 보며 한숨 돌린 길버트가 자신에게 다가온 에코를 응시했다. 그를 말리지 않은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에코는 길버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무덤덤한 어조로
“에코는 빈센트 님이 시키신 일만 합니다.” 라고 말한 뒤 주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허망한 기분이 된 길버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빈센트가 있는 주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빈센트를 움직이게 만든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빈센트 님, 화이트데이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죠. 남성이 여성에게 사탕을 주는 날이죠……?”
리즈벳의 질문에 답한 빈센트는 제 앞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향이 짙게 퍼지며 넘어가는 홍차의 느낌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만족스러운 답변이 못되었는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즈벳을 발견한 빈센트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하고 능청스레 물었다. 사실 그는 리즈벳의 질문을 들을 때부터 그녀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꿰뚫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하는 대답을 말해 주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저러한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원하는 게 무엇인지 표정 혹은 행동을 통해 알려 주고, 은연중에 바라는 것을 갈구하고, 빈센트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었을 때에 짓는 그 누구보다도 해맑은 표정까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는 것이 빈센트에게 있어서 즐겁지 않은 일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물론 그녀는 자신이 빈센트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추호도 모르고 있을 테지만.
“들리는 소문으론 그냥 여성에게 주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
“그, 그럼 어떤 여성한테 줘야 되는 건데요?”
으하하. 방금까지 시무룩한 티를 내던 아가씨는 어디로 가고 환하게 웃으며 반문해 오는 모습을 본 빈센트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호탕하게 웃은 건지 두 눈 가득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훔친 후에야 빨갛게 상기된 리즈벳의 두 볼을 목도한 빈센트가 아차 싶어 황급히 웃음기를 거두었다. 실수했다. 아무리 웃음이 나왔다고는 해도 면전에 대고 호탕하게 웃는 것이 얼마나 면구스러운 짓인지 잘 알고 있는 그로선 도저히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대할 자신이 없었다. 고개가 점점 바닥을 향해 수그러들고, 꺼내야 할 사과의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감도는 중에 먼저 말은 꺼낸 이는 리즈벳이었다.
“저 빈센트 님을 만나면서 이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봤는데,”
“…….”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지금 엄청 기뻐요.”
―라고 말해 주어서 말이지. 어떻게든 이 사람에겐 선물해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밖에서 빈센트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던 길버트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뒤에 앉아 있었다. 곧이어 설탕물이 담겨 있던 냄비 속에서 슬라이스 과일들을 꺼내어 건조대에 올려놓은 빈센트가 길버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까지도 제 동생이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빈센트가 좋아하는 여성의 행복을 위해 지고지순한 정성을 들였다는 것, 이것 하나만큼은 알 것 같았다.
* * *
드디어 다가온 3월 14일, 약속 시간에 맞춰 레인즈워스 가로 마중을 나간 빈센트가 조심스레 걸어 나온 리즈벳의 앞에 섰다. 오늘을 위해 아껴두고 있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에 검은 리본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리즈벳은 마치 겨울의 신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흐드러지게 내려온 붉은 머리 또한 드레스와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마차로 레베이유까지 이동하는 동안 리즈벳의 신경은 줄곧 자신이 가져온 상자에 쏠려 있는 듯했다. 좌우로 몸을 바르작거리고, 손을 배배 꼬고, 입을 달싹거리고. 눈에 뻔히 보이는 행동들에 빈센트는 금방이라도 ‘당신의 것이에요.’ 하고 입을 열어 버릴 것 같았지만, 종국에 얻게 될 것들을 위해 지금 당장은 꾹 눌러 담기로 했다.
수도에 도착한 뒤 항상 함께 걷던 거리를 걷는 동안 리즈벳은 그간 자신에게 있었던 일상들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최근 계약한 체인과 있었던 일, 처음으로 판도라의 일을 나갔던 일, 해결하는 도중에 있었던 사건들과 자신이 체인을 사용하고 며칠 동안 앓아누웠던 일 등등. 리즈벳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갖가지 반응을 해 주던 빈센트가 걸음을 멈춘 곳은 한 찻집 앞이었다.
“헉, 이곳 홍차 엄청나게 맛있어요.”
“후후, 그래요……?”
머릿속에선 손을 내저으며 질색하던 샤론과 브레이크가 상상되고 있었지만 캐물어 알아낸 보람이 있네요, 라는 말은 속으로 조용히 읊조리기로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홍차를 후후 불어 조심스럽게 마시는 리즈벳이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기 전에 이 사탕을 전해 준다. 이것이 빈센트의 계획이었건만, 어째서인지 그는 쉽사리 선물 상자를 전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냐고? 바로 대뜸 찻잔을 내려놓더니 대뜸 빈센트와 시선을 맞춰 오는 이분 때문에.
말하기를 망설이고, 시선을 맞추고, 다시 망설이고, 그것을 계속 반복하고. 이러한 분위기로 보아 하니 어지간히 상자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인 듯해 괜스레 놀리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마치 아까 전 수도로 이동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달싹거리는 입에 빈센트의 입가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저기, 빈센트 님!”
“네. 리즈벳 님.”
“그러니까, 저…….”
“저?”
“으음, 아까 가져오신 상자 말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실례인 건 알지만 궁금해서 그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양새가 마치 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 같았다. 대소(大笑)의 기미가 또 한 번 빈센트의 몸 구석구석 스미고, 아까보다 조금 더 짙어진 미소를 짓고 있는 빈센트의 두 손엔 리즈벳이 그리도 알고 싶어 하는 상자가 들려 있었다. 테이블 위로 떠오른 상자를 보는 리즈벳의 연분홍빛 눈은 초롱초롱히 빛나고 있다.
“선물이에요.”
당신만을 위한.
마침내 상자가 그의 손을 떠난다. 바야흐로 데이트의 대미가 장식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