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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이 / 길버트x치이 (판도라하츠) / @BOTCHI__ ]

 

 

 

 "벌써 내일이 화이트데이인가…. 길, 사탕 준비했어?"


 "…사탕?"


 "화이트데이란 남성이 '사랑하는' 여성한테 사탕을 주며 고백하는 날이잖아? 안 줄 거야? 치이쨩한테."


 "……."

 

 유독 사랑하는, 을 강조하는 오즈의 앞에 홍차가 담긴 찻잔이 놓여졌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다시 부엌   으로 들어가 버리는 길버트의 뒷모습을 쫓으며 오즈는 우물대던 포크로 찻잔 옆의 반쯤 먹어버린, 더는 먹을 생각이 없는 쇼   트케이크를 조각조각 냈다. 찻잔에선 좋은 향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지금 오즈의 관심사는 이 뜨거운 홍차보 다 누가 봐도 깨끗하고 깔끔한 부엌에서 괜히 이것저것 정리하고 닦기 시작하는 길버트였다. 흐으으음―. 눈을 가늘게 뜬 오   즈는 생크림과 과일이 뒤섞인 포크를 우물거리며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를 부엌 쪽으로 던졌다.

 

 "응? 길―버―트―."


 "……."


 "사탕 말이야, 사탕!"


 "…알아. 그런 것 정돈."

 

 분명 대답을 듣기 전까진 저 상태일 오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길버트는 마지못해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즈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의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싱크대를 닦던 행주를 내팽개치고 손을 씻으며 부엌에 항상 걸어놓는 시계를 힐끔거렸다. 이 대화를 피할 만한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연인지 뭔지, 마침 오즈를 판도라에 데려다줘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훔쳤다.

 

 "그만 돌아갈 시간이야, 오즈."


 "…흐으음."

 

 급하게 코트를 몸에 꿰어 입는 길버트를 예리한 시선으로 훑던 오즈가 '뭐, 됐나.'하며 포크를 내려놓고 여전히 김이 올라오는 홍차를 작게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3월 13일의 늦은 오후.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 * *


 길버트의 자취집이 위치한 레베이유의 저잣거리는 사방이 달큼한 향으로 가득했다. 진한 설탕의 단내와 과일이 섞인 듯한 그런 향. 거리의 가게들은 갖가지 사탕 류들을 아예 밖에 내놓고 팔고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그는 그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그 조잡한 향을 맡으며 집을 향해 걸었다.


 화이트데이…. 머릿속으로 되뇌며 길버트는 생각했다. 생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마냥 익숙하지도 않은, 그런 날. 이미 아침 일찍부터 치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잔뜩 만들어놓았으면서도 길버트가 오즈의 물음에 당당하게 답하지 못한 건,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을 어떻게든 말해보라 한다면…그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다. 자신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좋아해 주는 치이지만, 사탕보다 더 뜻깊은, 의미 있는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다. 사탕을 주며 고백하는 날이라고는 해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표현해 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무엇을 말하며 어떤 것을 줘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동생인 빈센트라면 조언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그를 찾아갈 생각도 했다. 그는 자신과 다르게 곧잘 여자들을 대하는 법을 배웠었으니. 치이에 관한 것을 그와 상의하기엔 엄두가 나질 않아 금방 포기했지만.
 

 후우. 한숨과 함께 물고 있던 담배 개비를 떨군 길버트가 구두 굽으로 그것을 짓이겨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얕은 연기조차 지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버려진 개비만 벌써 몇십 개째인지. 절대 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담배는 치이를 만나면서 자연스레 멀어지고 멀리하게 되었고, 덕분에 한동안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 그의 라이터는 이젠 그저 무거운 쇳덩이가 되어버려 코트 품 속에서 무겁게 자리 잡은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렇게, 조금씩 자신을 바꿔놓고 있었다. 담배도 담배지만, 길버트 나이트레이가 '연인'을 위해 화이트데이 같은 기념일을 챙기는 날이 온다고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날이 조금 깊어지자 그의 주위는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여기저기 외쳐대는 상인들의 목소리로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일단, 집에 돌아가자. 이곳에서 이렇게 고민해봤자 나아질 게 없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막 떼어지던 길버트의 발걸음은 곧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꽃….'

 

 사방에서 풍겨오는 사탕 단 냄새에 묻혀있던 꽃향기. 그 향기를 따라 작은 꽃집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꽃. 길버트는 문득 자신의 자취집 방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말린 꽃 갈피들을 떠올렸다. 모두 치이로부터 받은 꽃다발로 만든 갈피들이었다. 꽃도, 꽃 선물도 좋아하는 그녀가 언제부터인가 자신에게 보내오기 시작한 그 꽃다발들로. 그 어느 날, 대뜸 품에 꽃다발이 안겨졌을 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첫 연애를 시작한 여자라도 된 듯한 기분에 머쓱했던 길버트였다. 하지만 어느새 꽃을 감쌌던 포장지는 물론이고 그것을 묶은 리본조차 소중하게 되어버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석진 서랍에 보관하게 돼버린 것이다. 물론, 이건 자신 외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브레이크나 브레이크나 브레이크 같은 브레이크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어떻게 될지(이곳저곳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게) 불 보듯 뻔하다.

 

 "절대 사절이야, 그런 건…."

 

 그건 그렇고…. 길버트는 자기도 모르게 절레절레 젓고 있던 고개를 꽃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왜 이렇게 당연한 걸 이제야 떠올렸는지. 어떤 날이든, 그저 내가 정말 주고 싶은 것과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을 가득 안겨주면 되는 건데.

 

 "일단…."

 

 뭘 해야 할지는 알겠다.


 * * *

 

 전 날 밤만 해도 소란스럽다 못해 부산스러웠던 저잣거리는 새로운 날이 밝고 오후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졌지만 이곳저곳 연인들이 배회하고, 가게를 기웃거리는 몇몇 남성들로 복작거렸다. 3월의 밝고 포근한 날씨. 누가 봐도 연인의 날이었다.

 

 여느 때와 똑같지만 똑같지 않은 그 거리에서 푸른 끈으로 머리를 묶고 정장을 차려입은 길버트는 돋보였다. 그는 길거리의 여인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을 말끔히 무시한 채 걸었다.

 

 속한 시간, 약속된 장소. 거리를 지나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원으로 들어가기 전, 길버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와 분홍빛이 가득한 장미 꽃다발을 한 번 훑었다. 꽃다발에선 싱그러운 향기가 훅 올라와 그의 코 끝을 간질였다. 저 멀리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치이가 보였고, 치이도 길버트를 막 발견했는지 작게 소리치며 손을 흔들어왔다.

 

"앗, 길! 여기예요, 여기!"

 

 길버트는 그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그리고 다가갔다.

 

 작은 상자와 꽃다발을 뒤에 숨긴 채로. 내가 정말 주고 싶은 것,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 빨리 너에게 이걸 전해주고 싶다. 안겨주고 싶다.

 

 치이 에달리. 사랑하는 네가 예쁘게 웃어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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