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즈엘 / 리즈x로셀레 (언라이트) / Roszel_Lafarg ]
얼기설기 엮인 화관이 벽에 걸린 채 곱게 마르기 시작한 지 어느새 약 한 달을 채워가고 있었다. 솔직한 심경을 서술하자면, 제풀에 바스라진 꽃잎들이 바닥을 조금씩 어지럽힐 때마다 선물을 받았을 당시의 기쁨과 더불어 꽃잎들이 좀 더 오래 버텨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곤 했다. 한 때는 박제에 일가견이 있는 그룬왈드에게 부탁하려고 했지만 역시 그는 동물의 사체가 아니면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루드는 꽃을 가꾸는 것에 의의를 두었을 뿐, 이미 꺾인 꽃을 오래도록 시들지 않게끔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밝지 않은 눈치였기 때문에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그레고르? 그래. 분명 그가 들고 다니는 무기 중에 영구히 보존된 장미가 있긴 하지만, 그건…….
로셀레는 필름의 내용을 재생하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회상에 잠겨있던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몇 번이나 똑같이 되짚어봐야 귀찮은 작업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번만큼은 지독하리만치 오랫동안 미련을 끌고 있다. 그건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화관이 ‘어느 특별한 전사’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던 탓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더 큰 추억을 만들어서 미련의 크기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침 시기도 적당했다.
“리즈, 혹시 지금 시간 있어?”
“물론이지. 무슨 일 있나? 혹시 또 탐색인가?”
“아냐. 탐색도 아니고. 어……. 마시멜로, 같이 먹을래?”
“이런 시간에 갑자기?”
로셀레 본인이 생각하더라도, 참 돌발적이고도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이를테면 베갯머리에 놓인 동화책을 밤늦게까지 읽어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일까. 그럼에도 리즈는 보는 사람이 경쾌하다 느낄 정도로 간결하게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달리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소리 없이 주장하는 흔적들이 엿보였는데도.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그냥 쉬고 싶으면 그냥 쉬러 가도 돼.”
“괜찮아. 같이 어울려주지도 못할 정도로는 지치지 않았다만.”
“그렇다면 다행인데,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야.”
“알고 있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따뜻하고도 투박한 청년의 손길을 어찌 매정하게 회피할 수 있으랴. 조금이라도 더 방심하고 넋을 놓았더라면 지금쯤 손에 들고 있던 마시멜로 봉지가 바닥과 차갑게 입맞추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잠시만 기다려. 그 말만을 귓가에 가늘게 남기고 잠시간 자리를 비웠던 리즈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마른 나뭇가지 몇 개와 어디서 본 듯한 막대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저걸 써서 마시멜로를 구워서 먹었던가.
불현듯 뇌리에서 반짝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가는 회상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었다.
“다른 녀석들도 불러올까?”
“아냐, 지금은 너랑 나만 있으면 돼.”
“누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능력을 쓰는 건 달가워하지 않던 (정확히는 ‘내가 무슨 휴대용 라이터도 아니고’라며 거의 거절하곤 했다.) 그가 다른 도구도 없이 직접 장작에 불꽃을 일으켜주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직접 꼬챙이에 꽂아서 구워주고 있다는 이 상황이 그녀에게 있어선 놀라운 한편 어쩔 수 없이 기쁘기도 했다. 리즈의 진의가 어떻든 간에, 적어도 로셀레의 입장에서는 그러했다. 타들어가는 장작 소리와 따가울 정도의 열기 속에서, 잘 구워진 겉면을 먹고 남은 알맹이를 굽는 작업을 반복하며 입의 심심함을 달래는 동안 마시멜로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가에 대해서도 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시자. 진짜 용건은?”
“…응?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정말 마시멜로만 먹으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것 같아서.”
“으음…. 난 그냥 너만 보고 가려고 여기까지 오기도 하는데?”
“지시자의 귀찮음의 기준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리즈도? 사실 나도 그래.”
비교적 가벼운 어투이긴 했어도 결코 농담만은 섞이지 않은 회화였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타들어가던 장작이 살짝 가라앉았을 즈음에 먼저 입을 연 건 로셀레 쪽이었다.
“화이트데이라고 알아?”
“아니. 처음 듣는군. 그런 날도 있었나?”
“나도 최근에야 알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 밸런타인데이랑 비슷하다는데, 남자가 여자한테 사탕이나 마시멜로 같은 걸 선물하는 날이라고 했던가?”
“…누가 그런 소리를?”
“그야……지나가던 자매님들이? 아, 루카옹이랑 아수라도 가르쳐줬어. 대부분의 전사님들은 다 모르는 눈치였지만. 지금 보니까 너도 몰랐었네.”
떠오르는 인물 하나당 손가락을 한 개씩 접어가며 혼자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목격한 리즈의 표정은 상당히 애매했다. 기뻐하는 건지, 놀라고 있는 건지, 쑥스러워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난처해하는 건지. 어느 방향으로 해석하든 분명 해답은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기분 나빴어?”
“아니.”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내가 저번 밸런타인데이에 선물을 나눠가져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네가 내 기억을 최우선시하고 내 과거 모습들을 일일이 모으는 것과 비슷한 호의의 표현인지 헷갈려. 그래서.”
로셀레가 알기에는, 적어도 악의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심중을 떠본다거나 하는 건 아닐 거라는, 정말로 헷갈려하는 도중일 거라는 막연한 신용이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거겠지. 게다가 리즈 라파르쥬, 이 남자가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상황은 굉장히 드문 편이다. 뭐? 그걸 그를 저택으로 데려온 후부터 지금까지도 지시자로서 줄곧 함께한 그녀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이상하게도 반장갑을 끼고 있는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과 손가락 끝에 알게 모르게 밴 듯한 탄내만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흐린 자각을 유지시켜주는 일종의 쐐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호의의 표현이야, 리즈.”
“역시나 그런 건가.”
“모르고 있었어? 그렇다면 말로 더 전달해야겠네.”
불꽃을 조종하던 왼손이 뒷덜미의 빛바랜 금발을 머쓱하게 헝클었다. 그 모습조차 괜히 필요 이상으로 달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먹었던 마시멜로 탓이라고……하기에는 이미 한참 늦은 것 같다. 로셀레의 투명한 자안紫眼 깊은 곳에서, 잔잔한 수면 위의 파문 같은 일렁임 정도로 정체되어있던 무언가가 더욱 거칠고 선명하게 그리고 더욱 구체적으로 그 형태을 바꾸고 있었다.
“리즈, 나중에 나랑 결혼해줬으면 해.”
“…지시자, 잠깐만?”
“말 그대로의 의미. 이제 네 기억도 완전해지고 그러면 넌 곧 지상으로 돌아가서 자유로워질 거잖아. 그러니까 지상으로 돌아가면, 그 때.”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
“나도 같이 자유롭게 해줘.”
“로셀레.”
“이제 알았어? ……이 정도가 아니었으면 귀찮아서 쿠키 같은 것도 일일이 만들면서까지 이벤트를 챙기지도 않았을 거고, 네가 입었던 옷들과 똑같은 디자인의 의상을 모아서 입고 다니지도 않았을 거고, 네 기억을 되찾았는데도 네 과거의 모습을 차곡차곡 다시 모아두고 있지도 않았을 거야. 알잖아. 내 성격.”
이 지시자는 도대체 어디서 저런 말들을 배워 온 걸까.
리즈의 손은 어느 틈엔가 두통을 앓는 양 이마를 짚고 있었다. 수많은 전사들 중에서 용의자를 추려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추리하는 것은 좋았으나, 안타깝게도 마지막 회화를 우연으로나 고의로나 주워들은 전사들이 있다는 사실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다. 본인에게나 그녀에게나 귀찮을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몸소 깨닫는 건, 일단 아직 일정한 한도 이상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숙한 지시자를 진정시키고 난 후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