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셈 / 셈x가브리엘 (최강의 군단) / @sem_0210 ]
화이트데이. 당신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날이 되어버렸다. 당신의 부재가 가장 큰 날의 이른 오후를 맞이해 버렸다.
햇살을 알림삼아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거칠게 걷었다. 오늘만큼은 다정하게 닿아오는 살갗과 위로의 말들까지도 역겹고 불쾌한 날이 되어버려서. 살갗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면이 까슬하게만 느껴졌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미용가위를 집고 비적비적 화장실로 걸어 들어간다.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붕 떠 있고 눈 밑엔 검은색이, 눈가엔 붉은색이 깔려있었다. 얼룩진 거울에 그런 엉망인 몰골이 비춰지자 더욱 엉망이고 제대로 된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거울을 보며 정확하게 하루만큼 자라난 앞머리의 끄트머리를 미용가위로 썩둑썩둑 잘랐다. 코앞에서 새하얀 머리카락의 일부가 떨어진다. 눈을 평소보다 크게 떠버린다면 머리카락이 눈알에 콕콕 찔릴 애매한 길이. 눈두덩이에 머리카락 끝이 찔리지만 별 상관하지 않았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지만 잘린 머리카락들이 후두둑 내리는 게 하얀 눈이 내리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며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틀어 놓는다. 머리카락의 조각들이 물에 휩쓸려 하수구로 쓸려 내려갔다.
아직 제대로 깨지 못한 잠도 깨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도 떼어낼 겸,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서 얼굴의 물기는 닦지 않은 채로 냉장고를 연다. 턱 끝으로 얼굴의 물이 모이고 뚝, 뚝.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얼굴을 걸리고 발가락을 꽁꽁 얼렸다.
냉장고 안엔 차가운 조명을 받으며 생기 없이 존재하는 인스턴트 음식들이 전부였다. 저 구석 안쪽에 있는 파스타는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지나있었지만 포장도 뜯지 않은 터라 다행히도 냄새는 나지 않았다. 버리기엔 귀찮고 냅두자니 공간 차지인 파스타. 냉장고 안은 이것저것으로 가득 차있지만 그럴싸하게 먹을 만한 건 없어보였다. 오늘 점심도 먹을 게 없네. 거르자.
그러고보니 오늘 화이트 데이지.
사탕을 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젯밤에 스스로 만들기로 했다.
스스로 만들어서 나한테 선물하려고.
삐. 삐이이. 삐이이. 냉장고에서 이제 그만 몸을 닫아달라는 울음을 터뜨렸다. 발가락이 차갑게 식었다. 육중한 문을 닫고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설탕을 싱크대 아래서 찾았다. 설탕은 포장 조차도 뜯지 않은채로 먼지만 가득히 쌓여있었다. 먼지를 탈탈 털고 설탕을 집어오자 투명한 비닐에 담겨있는 설탕은 자기네들끼리 꽁꽁 뭉쳐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가루로 부수고 한 귀퉁이를 서걱. 잘려나간 모퉁이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던 냄비 머리에 조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은 만큼 부었다. 모래산이 후두두둑 쌓인다. 너무 많이 쏟아내어 버렸는지 설탕이 녹아서 설탕물이 될 때 끓어넘칠 것 같아서 미련 없이 하수구에 설탕을 한 컵 덜어냈다. 싱크대에 설탕 모래가 가득하다. 불을 켜고 설탕을 녹이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설탕은 금방 녹아버린다. 설탕은 형체도 없이 녹아선 끈적하게 보이는, 최선을 다해 끓고 있는 설탕물이 되어버렸다. 가장자리부터 색 없는 거품들이 진득하게 올라와서는 폭폭 터져버리고 만다. 개구리알이나 도롱뇽알이 수면 위로 올라와 터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아, 물풀이다. 물풀 같네.
설탕 다음엔 물엿. 물엿을 넣어야 하는데. 어디에 있더라. 설탕을 찾았던 함을 뒤적이며 식용유나 간장이 서 있는 곳을 뒤적여 보았다. 올리고당? 이건 아닌데. 이건가? 식용유잖아. 이리저리 재료들을 하나 둘 치워가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상태가 영 좋지 못한 물엿을 발견하고서 끄집어냈다.
물엿은 머리에서부터 제 체액을 흘려 용기는 끈적였고 흘러넘친 물엿 위에는 오래된 먼지가 들러붙어 보기엔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뚜껑을 열어보자 주둥이의 상태가 나빠보이진 않다. 조금 기분이 찜찜하긴 했지만 우선 딱히 더러워 보이지도 않고 말이야. 물엿을 물풀 가운데에 주욱 짰다. 물엿이 닿은 부분은 거품이 팍 사그라졌다. 주걱으로 냄비를 젓는다.
오늘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당신의 커피향보단 설탕의 단내가 더 짙어져 집을 채웠다. 이질적인 냄새다.
물풀이 물엿과 만나서 끓는 것도 금방이었다. 어쩌면 시간은 평소대로 흘러가는데 멍하니 냄비 속을 구경만 하고 있어서 시간이 훅훅 가버렸던 걸 지도 모르고. 잘 타오르던 불을 잠시 꺼두고 투명한 거품이 식을 동안 기다리자.
단내가 집 안에 가득하다. 당신이 늘 풍기고 다니던 커피향이 나지 않아 새삼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심장을 찢어놓는다. 집 안에 가득한 단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신의 부재를 커피향으로 채우고 싶어서, 커피를 찾는다. 커피는 언제나 찻장에 있었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이라 언제부턴가 당신만의 허술한 금고가 되어버린 찻장 말이야.
까치발을 들어 찻장에 손을 뻗었다. 역시나 손잡이에 닿지 않는다. 좀 더 힘껏 팔을 뻗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뻗고 종아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까치발을 서 보지만 닿지 않는다. 냄비를 엎지 않도록 조심조심히 제자리에서 뛰어보아도 번들거리는 손잡이엔 살갗도 닿지 않았다. 예전에 코코아를 마시고 싶을 땐 당신이 열어 줬었는데.
당신이 없는 일 년 사이에 나는 기억도, 키도 멈춰버렸다는 사실에 가벼운 절망을 하며 결국은 뒤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찬장을 손쉽게 열었다. 의자를 밟고 올라선 높이만큼 사람의 부재가 뚫어 놓은 구멍의 크기가 넓어졌다.
어서 이 구멍을 메꾸자. 커피는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고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오늘 아침 내 머리카락이 딱 하루만큼 자라 있었던 것과 같은 느낌으로 정확하게 일 년 치 먼지가 커피 봉지 위에 내려앉아있다. 차가운 입김을 후후 불자 먼지가 힘없이 뒤로 밀려나고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두 봉지를 집어온다.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전원을 켠다.
찻장 아래서 커피와 똑같이 일 년 분량의 먼지가 착실히 쌓여있는 머그잔을 끄집어내고 흐르는 물에 먼지를 박박 문질러 씻겼다. 먼지들은 옆에 있던 먼지와 뭉쳐져 물을 머금고 지우개 가루처럼 뭉텅뭉텅 하수구로 쓸려 내려갔다. 머그잔의 바닥엔 커피가 남기고 간 얼룩이 남아있다. 세제까지 묻혀가며 닦아보지만 커피의 침전물이 남기고 간 흔적은 아무리 닦아도 사라지지가 않는다. 당신이 남기고 간 일부라고 생각하며 닦는 걸 포기했다.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물기를 닦으며 머그컵을 바라보았다. 머그컵의 새하얀 배경은 당신의 날개를 상징하는 것, 분홍색으로 프린트 된 활자는 당신의 머리칼을 상징하는 것. 만약 당신이 내게 그리 말한다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그럴싸하다 말하며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보니 머그컵 주제에 주인이랑 똑 닮아있다.
물이 다 끓었다. 커피 봉지를 까서 머그잔 안에 부어 넣자 바닥에 남아있던 물과 만나면서 가장자리가 젖어 들어가는 게 보인다. 힘차게 끓어오르는 물을 머그잔 안에 부어넣었다. 물이 주변으로 톡톡 튀어오른다. 커피가 순식간에 물과 섞여서 단내 가득한 집 안을 이번엔 커피향으로 채워간다.
스으읍, 하아.
커피향.
당신의 냄새가 바로 앞에서 맡아졌다. 꼭 당신이 옆에서 머그잔을 꽈악 쥐고 있는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가물거리는 얼굴을 떠올렸다. 여전히 커피를 좋아하고 있을까. 뻥 뚫린 구멍에 커피를 부어넣었다. 조금은 메워졌다. 당신이 생각나선지 아니면 커피향이 너무 독해선지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커피향은 계속해서 코 끝에 맴돌았다. 그러다 코가 결국은 마비되어서 잠시동안 잊고 있던 단내가 솔솔 코로 들어온다. 허술하게 메워진 구멍은 허술하게 아래로 줄줄 흘러내린다. 존재의 공백.
다시 커피를 탈까?
꼭 성냥팔이소녀가 되어버린 기분에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며 눈을 떴다. 커피향이 내 앞에서 맡아진다 해도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건 아니니까.
커피향은 확실히 당신의 부재를 덜 실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눈을 뜨면 나는 당신이 내 옆에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도움이 되진 못했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당신이 옆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짧게나마 느꼈다는 것에 줄줄 흘러내린 구멍을 어설프게나 막아본다.
지금쯤이면 물엿 덩어리는 거의 다 식었겠지. 냉장고를 다시 열고 유통기한이 지난 파스타 뒤에 세워져 있던 몰드를 찾아 왔다. 습기가 플라스틱에 달라붙은 몰드를 물에 한 번 헹궈내고는 물풀을 주걱으로 휙휙 저어본다. 적당히 꾸덕하고 들러붙지도 않는다. 냄비의 양 손잡이를 손수건을 덮어 잡고는 패여진 홈에 줄줄 부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성급했는지 아직 제대로 식지 않은 물풀들의 열기가 얼굴에 닿아왔다. 얼굴 가죽이 당긴다.
몰드에 물풀까지 부어냈으니 이젠 별로 할 게 없다. 물풀 가득한 몰드를 냉장고에 굳혀두고 짧은 낮잠을 자면 내게 선물할 사탕은 완성되니까.
몰드를 냉동실 안으로 깊숙하게 밀어 넣고 무기력하게 소파에 누웠다. 머리에 베인 쿠션이 오늘따라 더욱 푹신했다. 머리맡으로 내리쬐는 태양은 어느새 가물가물해진 햇빛을 비춘다. 일어난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머리맡에서 받는 일몰의 햇빛은 몸을 더 노곤하게 만들었다. 늦은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사탕이 굳어 있을까. 몸이 노곤하고 잠이 몰려온다. 조금만 자자. 조금만. 시간을 빨리 보내기엔 잠이 가장 좋은 수법이니까.
시큰거리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서 느리게 숨을 쉬고 긴장이 풀려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을 때, 탁자 위에서 부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정신이 바짝 들고 꿈의 경계에 발을 내딛은 순간에 현실로 끌려나왔다. 마치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하필 소파가 침대만큼 푹신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 때 건져져 버렸다. 더 이상 푹신하지 못한 베개를 집어 화풀이로 바닥에 내동댕이를 쳤다. 여전히 휴대폰은 탁자 위에서 웅웅대면서 진동을 울린다. 팔을 뻗어 짜증 가득한 모션으로 휴대폰을 낚아채고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줄 사람이 몇 없으니까. 스피커를 귀에 가져다 대고서 입을 다물었다.
“전화를 받고선 여보세요, 란 말도 안 해 주십니까. 여전하시군요.”
“왜 전화 했어요?”
마냥 달갑지만은 못한 전화에 말을 톡 쏘았다. 좀 자려고 했는데.
“별 일은 아닙니다. 해도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날도 날이라서 같이 그 천사의... 무덤이라도 같이 다녀올까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안 갈 거 알고 있잖아요.”
짧은 침묵. 둘 다 말이 없다.
다시 당신을 찾아간다고 해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좋다고 그곳을 간다는 거야.
“그래도 일 년 동안 한 번도 안 갔는데 정말로 안 가실 겁니까? 굳이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안 갈래요. 가서 딱히 할 것도 없고... 집에서 가끔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 주고 있는걸요. 천사장에게 한낱 인간이 기도한다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렇습니까. 요즘 잠잠한 안부도 물어볼 겸 전화 드렸습니다. 오늘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군요.”
“기분은 그냥, 평소같아요. 벌써 한 해가 지났는데 이 정도 되면 익숙할 만도 하잖아요. 그냥, 어제나 별 다름 없는 날이고.”
또다시 둘만의 침묵. 어색함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끊을게요. 잠깐 할 일이 있어서요. 좋은 저녁 보내세요, 히토리. 가브리엘에게 다녀온다면 내 안부도 전해줄래요? 잘 지내고 있고 괜찮다고만 전해주세요. 음, 그러니까... 전화해줘서 고맙고. 끊을게요. 오늘 노을 예쁘니까 시간나면 하늘 좀 보세요.”
“예. 노을이 따뜻하군요. 좋은 저녁 보내십시오.”
서로를 걱정하던 전화가 끊겼다. 부스러진 대화의 마무리를 힘겹게 짓고서 정신을 차려보니 느른하게 다가오던 잠은 한 순간에 저 멀리로 도망쳐 눈이 말똥말똥 뜨였다. 당신이 깊게 깊게 잠들어 있는 곳을 간다면 당신의 부재가 남기고 간 구멍이 넓어지다 못해 모든 게 우르르 무너질 것 같아서 찾아갈 용기가 없을 뿐이지.
해가 천천히 여물어져 갔다. 오늘이 반나절 남았다. 늦게 일어난 보람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구나.
체온 때문에 뜨끈히 달아오른 핸드폰을 손에 쥐고서 다시 소파에 가지런히 누웠다. 죽어버린 시체가 관짝에 누워있듯이 배꼽 위에 편안히 손을 포개어 올려두었다. 눈을 멍청하게 깜빡이며 멀건 천장만 바라본다.
화이트 데이는 무슨. 얼어죽을 사탕. 일생을 통틀어, 혼자서 사탕과 사랑이란 단어에 동떨어진 내가 오늘만큼 비참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는 내용에 다시 눈을 멍청하게 깜빡깜빡. 숨을 쉬자 배가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세상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공백이 배 안을 더부룩하게 채운 기분이었다. 이 더부룩함을 끌어안고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다니.
포기하자.
몸을 도로 일으켰다. 그 전화만 아니였다면 지금은 옅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을 텐데. 냉동고를 열고 몰드를 꺼냈다. 담긴 물풀의 무게 때문에 연약한 플라스틱 몰드는 등이 휘어졌지만 어느새 열기는 다 가셨는지 몰드에 담을 때처럼 줄줄 흘러내리진 않았다.
몰드를 탁자에 꺼내두고 호일 포장에 담겨있는 알약을 꺼내듯 뒷면을 꾹꾹 뒤집어 눌렀다. 겉만 식은 사탕은 나오지 않겠다며 반항하지만 결국엔 몸뚱아리가 몰드 밖으로 나와 탁자 위로 굴러갔다. 그렇게 약의 포장지를 까듯 사탕 세 알을 몰드에서 까냈다. 매끄러운 탁자 위를 구른다. 가장자리가 깔끔하지 못한 사탕이 떨어지면서 주위엔 부스러리가 깔려있다. 큼직한 사탕만 주워서 옆에 있던 커피에 퐁, 퐁, 퐁. 사탕이 머그잔의 바닥에 부닥치고 사탕끼리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탕도 설탕 덩어리고 커피엔 설탕을 넣어 마시니까 사탕도 넣을 수도 있지.
어쨌던 오늘 사탕 챙겨줘서 고마워, 셈.
나에게 선물한 사탕을 내가 탄 커피에 넣고 내게 감사인사를 하는 꼴이란. 당신이 있다면 이렇게 비참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비참하다. 안쓰럽다. 불쌍하다.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물이 많아 맹맹하고 달지도 못한, 어중간한 맛이었다. 역시 나는 커피를 타는 거엔 재능은 없는 것 같애. 그래도 별 생각없이 마셨다. 커피를 물 마시듯 한 모금 크게 들이마시며 입술에 사탕이 닿으면 입술을 벌려 설탕 맛 밖에 나지 않는 사탕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입 안은 설탕으로 가득한 단맛밖에 나지 않는데 목구멍은 쓰다. 모순덩어리 커피를 마시면서 당신 생각을 하며 커피를 꾸역꾸역 배 속으로 들이밀었다.
세상의 언어로 표현 못할 공백을 꾸역꾸역 당신의 일부로 위장을 채워놓았다. 머그잔이 금세 비어버린다. 빈 머그잔을 힘없이 싱크대 안에 넣고 도로 소파로 비틀비틀 걸어와 철푸덕 엎어졌다.
머리맡의 태양빛이 따뜻하게 닿아오지 않았다. 이젠 태양이 완전히 아래로 꺼져 버린거다. 내일 다시 세상으로 올라올 준비를 하기 위해서 태양은 아래로 꺼졌다. 부엉이는 먹이를 찾아 눈을 동그랗게 뜰 시간이고 보통의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과 둥글게 둘러앉아 밥을 먹을 시간이었다.
빈 속에 들어간 커피와 사탕이 박박 속내를 긁고 뒤집는 기분이었다. 스스로에게 선물한 사탕도 잘 먹었고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도 마셨으니 이젠 다시 잠들까. 자고 일어나면 뒤집어진 속도 조금은 나아질테지.
깨어난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당신이 없는 오늘 하루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어서 어서 잠들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깨어 있어 보았자 무기력한 시간만이 흘러갈 것이고 당신의 허전함이 일분일초가 지나갈 동안 배가 되어 구멍을 넓힐 테니까.
머리맡을 더듬는다. 싸늘한 집 온도에 잘 식어있는 약병을 가져와서 뚜껑을 꾹 아래로 누르고 손목을 돌린다. 검은 뚜껑이 드르륵, 하면서 열리고 손바닥을 떼자 바닥 어딘가로 굴러갔다. 손바닥 위에 작은 알갱이들을 두어개 덜어내었다.
입에 넣고, 씹는다. 커피보단 몇 배나 쓰다. 꼭꼭 씹어먹었다. 당신이 미운 만큼 씹었다. 당신이 미워서 모든걸 토해낼 만큼 목구멍이 쓰렸다.
약통은 소파 아래에 툭, 내려놓았다. 약통이 쓰러져 어딘가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불 꺼야하는데. 머리로는 불을 끄라고 생각하지만 무기력이 몸을 가득히 삼켰다. 소파 가죽에 코를 박고 눈을 감는다. 잠들기 전에 기도라도 한 번 해줄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포기하자. 당신이 알려준 기도문 따위 읊어보았자 마음의 평안은커녕 안정도 못 할 테니까.
눈을 감기 전에 멀건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띄었다. 의미 없는 숫자가 가득한 숫자의 파도 속에서 3월 14일. 화이트 데이. 당신을 생각하기 싫어서 늦잠을 자고 일찍 잠들어버리는 날. 하루를 몇 시간 보내지 않고 다시 잠들어가는 날.
당신이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려던 날. 그리고 당신이 영영 내게 사랑을 속삭일 수 없는 날이 되어버린 날.
유난히 오늘따라 외로움을 타며 오늘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